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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와 이탈리아 파시즘 – 비행과 자유와 저항의 은유

by 깔꼬미 2025. 4. 15.

'붉은 돼지' 속 장면

 

스튜디오 지브리의 1992년 작품 '붉은 돼지'는 언뜻 보기엔 공중을 나는 판타지 애니메이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1920~30년대 이탈리아의 역사적 현실, 파시즘 체제, 그리고 인간성과 자유에 대한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돼지로 변한 주인공 ‘포르코 로소’는 단순한 저주받은 비행사가 아니라 시대의 폭력성과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품은 저항적 캐릭터다.
이번 글에서는 '붉은 돼지'가 배경으로 삼은 이탈리아 역사와 파시즘의 상징성 그리고 그 안에서 구현된 비행과 자유, 저항의 미학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붉은 돼지의 배경 –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작점

'붉은 돼지'의 시대적 배경은 1920~30년대 이탈리아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에 시달렸고 그 틈을 타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Fascist Party)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시기는 비행기의 군사화, 영웅주의 미화,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강조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포르코'는 한때 군인으로 활약했지만 전쟁 이후 인간 사회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돼지로 살아가겠다"는 선언과 함께 은둔한 전직 비행사다.

이는 단순한 설정이 아닌 전쟁과 파시즘의 광기에 저항하는 상징적 선언이라 하겠다.
이탈리아의 군국주의적 흐름 속에서 '포르코'는 ‘돼지’라는 타자적 존재로 국가의 명예와 전쟁 영웅 신화를 자발적으로 거부한 인간이라 볼 수 있다.

주인공 포르코 로소 – 자유와 저항의 상징

주인공 '포르코 로소'는 겉으로는 냉소적이고 고독한 인물이지만 그의 삶의 방식은 매우 정치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는 계약직 해적 사냥꾼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며 정부나 군대에 소속되지 않고 완전한 개인의 삶을 선택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당시 파시즘 체제 아래에서 국가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길 거부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특히 작품 속에서 군사국가가 그를 체포하려 할 때, '포르코'는 "이 나라가 싫어. 파시스트가 득세했잖아"라고 말하며, 작품 내 유일하게 정치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는 자유로운 하늘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이며, 비행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현실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은유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외형이 ‘돼지’라는 점 역시 중요한 상징인데 '돼지'는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하위의 존재로 여겨지지만, 작품 속 '포르코'는 오히려 진정한 인간성과 윤리를 지닌 존재로 나온다.
그는 여성과 동료를 존중하고, 전쟁의 잔혹함을 기억하며, 불필요한 폭력을 피하는 반면 인간들은 권력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계를 조종한다.

이러한 대비는 진짜 ‘돼지’는 누구인가에 대한 역설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하늘을 나는 존재 – 기술, 낭만, 그리고 반전의 메시지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기계에 대한 애정과 반전 메시지가 가장 조화롭게 담긴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항상 비행기를 사랑하면서도 그 기술이 전쟁과 파괴에 이용되는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해왔다.

'포르코'가 조종하는 레트로 양식의 비행기, 직접 손으로 설계하는 소녀 '피오', 정비소에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
이 모든 설정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을 넘어서 기술과 인간, 그리고 자유로운 삶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면, 경쟁자인 미국 출신의 '도널드 커티스'는 허세와 과시, 군사적 명예에 집착하는 인물로 등장하며,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은
총이 아닌 맨주먹으로 마무리되고 그 결과 역시 명예나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는 유쾌한 방식으로 끝난다.

이 결말은 전쟁적 남성성과 영웅주의에 대한 유쾌한 조롱이자 해체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붉은 돼지'는 진정한 용기란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살아남는 것임을 보여준다.

돼지는 돼지가 아니다 – 붉은 돼지의 시대적 메시지

'붉은 돼지'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에 역사, 철학, 정치, 감성, 기술 애호까지 다층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복합적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군사주의적 이념을 배경으로 삼되 그 속에서 '돼지'로 살아가는 주인공 '포르코'는 진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은둔과 저항을 선택한다.

'비행'은 자유의 은유이며, '돼지'는 타락한 인간 사회에 대한 반어법이다.
'붉은 돼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자유를 선택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