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할 때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화려한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 감성의 토대가 형성된 초기 시절, 특히 1979년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이 존재한다.
'빨간 머리 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지브리 설립 이전에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일환으로 참여한 작품으로 그가 여성 캐릭터, 자연과 감정의 연결, 일상 속 판타지라는 지브리 정체성을 관통하는 요소들을 실험하고 확립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빨간 머리 앤'이라는 고전 애니메이션 속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어떤 역할을 맡았고, 그의 미학과 주제 의식이 어떻게 이 작품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훗날 지브리 작품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세계명작극장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역할
1970~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세계명작극장’이라는 독특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 시리즈는 전 세계의 아동·청소년 문학 명작을 애니메이션 화한 TV 프로젝트였으며, 매년 한 작품씩 방영되었다.
'빨간 머리 앤(赤毛の アン)'은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총 50화로 제작되어 1979년 후지 TV에서 방영되었다.
감독은 지브리 공동 창립자인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초기 15화까지 콘티, 레이아웃, 배경 디자인 등 핵심 시각 구성에 참여했다.
특히 그는 ‘그린 게이블즈’ 주변의 숲과 자연, 계절 변화, 그리고 앤이 상상하는 판타지 장면을 시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앤이 상상 속에서 여왕이 되는 장면이나 숲 속에서 나무들과 대화하며 ‘비밀의 정원’을 꾸미는 장면 등은 그 당시로는 매우 실험적인 구성이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특유의 시각적 감성 표현 기법이 처음으로 집약적으로 적용된 순간들이었다. 이런 실험은 훗날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츠키와 메이가 숲의 정령을 만나는 장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환상 세계로 빠지는 장면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앤 셜리'라는 인물 – 지브리 소녀 캐릭터의 원형
명'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동시에 상상력과 지성, 감수성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소녀다.
그녀는 고아로 태어나 여러 가정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커스버트 남매가 사는 ‘그린 게이블즈’에 오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앤'의 캐릭터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가 지브리에서 만들어낸 대부분의 여성 주인공들은 '앤'의 정신적 후속자들입니다.
- '마녀배달부 키키'의 키키는 혼자 도시로 나와 자립하며 자신만의 일과 감정을 구축해 간다.
- '귀를 기울이면'의 시즈쿠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가능성을 시험하고 불안과 열등감을 극복한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는 낯선 세계에서 두려움에 맞서며 점차 주체적 존재로 성장한다.
이 모든 캐릭터는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고, 자신의 감정에 이름 붙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립적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는 '빨간 머리 앤'의 '앤'이 보여준 자아 탐색의 서사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앤'이 글과 상상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은 지브리 여성 캐릭터들이 창작 활동(글쓰기, 비행, 예술, 소통)을 통해 내면을 외부화하고 자아를 정립하는 특징으로 그대로 계승된다고 볼 수 있다.
풍경이 말하는 감정 – 미야자키 감독 연출의 기술적 출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빨간 머리 앤'에서 집중한 또 하나의 요소는 감정을 풍경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는 인간의 심리를 단지 얼굴 표정이나 대사로 표현하지 않고 창밖의 나무 그림자, 하늘의 빛 변화,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같은 일상적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앤'이 혼자 앉아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장면에서 햇빛이 점점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배경은 그녀의 감정 상태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들은 지브리 영화 전반에 걸쳐 이어집니다.
'바람이 분다'의 바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구름, '이웃집 토토로'의 숲과 그늘 등은 모두 감정의 배경이 아닌 감정 그 자체를 시각화하는 공간이다.
'빨간머리 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러한 감정적 공간 설계의 기법을 처음으로 정립한 작품이었다.
떠나지 못한 프로젝트 – 그러나 남겨진 유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빨간머리 앤'에 강한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15화까지 작업한 뒤 다른 프로젝트(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로 이직하게 되며 작품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은 초기 15화 동안 작품의 미학과 연출 흐름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그 이후 에피소드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스타일이 유지된 채 마무리된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개인에게도, 지브리에게도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얻은 연출적 감각과 서사적 관심은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과 지브리 여성 캐릭터들의 정체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빨간머리 앤'은 지브리의 정신적 시초였다
'빨간머리 앤'은 지브리 이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예술적 감수성과 서사 세계가 조용히 태동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결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은 TV 시리즈였고, 판타지나 액션이 전면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미야자키가 평생 탐구하게 될 “자립하는 소녀의 여정”, “자연과 감정의 공명”, “일상의 미학”이 모두 들어 있었다.
지브리는 '빨간머리 앤'을 기억한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 안에 남긴 소녀의 시선과 감정의 여운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살아 있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