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는 원래 1872년 영국 작가 위다(Ouida)의 소설이 원작이며, 19세기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배경으로 소년 '네로'와 늙은 개 '파트라슈'가 예술가로서의 꿈과 가난한 현실 사이에서 고통을 겪는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1975년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TV 애니메이션화되었으며 슬픔과 감동, 사회적 불의, 꿈의 좌절을 고스란히 담은 이 작품은 방영 당시부터 전국적인 눈물 열풍을 일으켰다.
이번 글에서는 '플란다스의 개'가 어떻게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서 윤리, 감정, 사회성, 죽음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예술적으로 다뤘는지, 그리고 이 작품이 지브리를 비롯한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에 끼친 영향을 보려고 한다.
가난, 꿈, 예술 – '네로'라는 캐릭터의 상징성
주인공 '네로'는 마치 한 편의 순수한 시처럼 구성된 인물로, 그는 그림을 사랑하며,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있는 루벤스의 걸작을 동경하는 소년이다. 하지만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가며 지속적으로 사회적 차별과 구조적 불이익을 겪는 인물이다.
그의 그림은 아무리 뛰어나도 ‘빈민’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며, 친구 '아로아'의 아버지는 계급 차이를 이유로 '네로'와의 교류를 막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도우려 하지 않고 끝내는 외면 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순수한 꿈을 어떻게 짓밟는가에 대한 극명한 은유다.
'네로'는 ‘예술가의 자질’을 타고났지만 그를 가로막는 것은 재능 부족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벽이다.
이러한 설정은 훗날 지브리의 '바람이 분다'에서 제로센 비행기를 설계한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와도 겹치는데, 그 역시 기술과 이상을 좇지만,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좌절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이미 1970년대에 개인의 꿈과 사회적 조건의 불일치를 직시하며 ‘애니메이션이 이런 것까지 다룰 수 있다’는 감정적 깊이를 제시한 선구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트라슈' – 인간과 동물의 유대를 넘어선 감정의 은유
'파트라슈'는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다.
그는 '네로'의 삶을 함께 짊어진 동료이자, 가족이며, 마지막 위안이자 구원의 존재다.
'네로'와 '파트라슈'는 말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고통 속에서 의지하며, 세상에 버림받은 순간에도 서로를 탓하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 눈보라 속 '네로'와 '파트라슈'가 대성당 안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서로의 품 안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장면은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죽음 묘사로 평가받는다.
이 장면은 일본 내에서 ‘전 국민이 우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신화를 만들었으며, 지금까지도 ‘가장 슬픈 엔딩’으로 기억되고 있다. 동물과 인간의 무언의 교감, 함께 떠나는 여정이라는 구조는 이후 지브리의 '이웃집 토토로'의 '사츠키'와 '메이'와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과 '갤리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와 '하쿠'와 같은 캐릭터 관계로 이어지며, 애니메이션이 ‘언어보다 깊은 정서’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현실을 직시한 애니메이션 – 죽음, 슬픔, 사회적 외면
'플란다스의 개'가 당시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놀라운 평가를 받은 이유는 이 작품이 죽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린이 대상 작품들이 슬픔이나 상실을 완곡하게 다루는 반면, '플란다스의 개'는 조부의 죽음,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 냉정한 마을 사람들의 외면, 그리고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네로'의 눈에는 끝끝내 루벤스의 그림을 봤다는 충족감이 남아 있었고, '파트라슈'와 함께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삶 전체를 아름답게 완성할 수 있는 마지막 위로가 되어준다.
이러한 엔딩은 지브리가 즐겨 쓰는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닌,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와 유사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쉽지 않지만 '나우시카'는 마지막 희망이 되고,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인간과 숲은 공존하지 못하지만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추억은 방울방울'은 완전한 로맨스 결말이 아닌 감정의 해소와 선택이 주는 울림이 남긴다.
'플란다스의 개'는 이처럼 감정의 흐름과 정서적 깊이를 남기는 엔딩 구조의 원형을 제시한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에게 미친 영향
이 작품은 지브리의 창립 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함께 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에서 연출과 작화, 예술을 공부하던 시기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현실을 진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며, 이후 '알프스 소녀 하이디', '추억은 방울방울', '가구야공주 이야기' 같은 작품에서 정서 중심의 연출 철학을 확립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또한 ‘사회와 인간, 자연과의 관계’를 그리는 데 있어 '플란다스의 개'의 서정성과 윤리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즉, 이 작품은 지브리의 정서적 미학과 윤리적 연출의 뿌리 중 하나로 평가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 ‘눈물 나는 명작’으로 축소되기엔 너무나 깊은 작품이다.
그것은 가난과 계급이라는 사회적 조건, 예술과 꿈이라는 인간의 본성, 죽음과 외면이라는 정서적 절벽 위에서 끝까지 순수함을 지킨 한 소년과 한 개의 이야기다.
또한 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재미’를 넘어서 ‘예술’과 ‘정서’와 ‘윤리’까지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신호탄이었다. '플란다스의 개'는 단지 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애니메이션으로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든 시작점이다.